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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c Nomad
어려서 인형놀이보다는 축구나 지우개따먹기에 더 열을 올리던 아이가 있었다. 한동안은 그래도 눈썹 빳빳하게 올라간 금발머리 공주님의 몸을 조심히 오려내놓고 이 옷, 저 옷 갈아입혀 가며 시간을 떼우기도 했지만 금새 실증을 내고 마당으로 달려나가던 아이였다. 4학년 즈음이였나, 언니랑 같이 위문품 상자안을 인형의 집처럼 꾸민답시고, 쿠킹호일을 붙여 겨울도 만들고, 벽에 책장그림도 그려넣고, 종이로 만든 테이블도 부엌공간에 놓아두고, 그때는 꿈속에서만 그리던 침대(당시 언니만 침대가 있었다. 나는 침대 옆에 요 깔고 잤다)에 리본 그려넣은 침대커버까지 그려놓고, 머리큰 가분수 종이인형을 오리고 붙이고 하면서 꽤 열심히 놀았었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 꽤 정교하고 재미있게 만들었던 그 박스는 그 후 처참하게 구겨..
겨우내 번갈아 가며 입고 다니던 히트 텍을 몇주만에 벗고 집을 나섰습니다. 조금은 차가운 바람이 귀를 넘어 지나갔지만, 얼굴로 함박 내리쬐는 햇살이 따스해 그 정도 바람쯤이야 웃으며 넘기게 됬습니다.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어깨에 올려진 두터운 찬기운을 떨치고 방을 나섰습니다. 아직은 시린 바람에 손이 곱긴 하지만, 단단한 흙 속에서 기운차게 땅을 뚫고 올라오는 파릇파릇한 봄 기운이 느껴져 손 마디를 쭉 펴 기지개를 핍니다. 겨우내 차곡차곡 쌓여진 지방덩어리를 태우고자 간만에 하얀 조깅화를 신고 골목을 나섰습니다. 옷을 입으면 어딘가 우둔해진 몸뚱아리를 느끼며 조금은 가벼운 기분으로 봄을 맞고자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두 팔을 힘차게 저으며 허리 펴고 산보를 나섭니다. 봄이 옵니다. 제게는 일년의 시작이 1..
인생 근심 걱정 없는 사람 누군고. 출세 하기 싫은 사람 누군고. 시기 질투 없는 사람 누군고. 흉허물 없는 사람 어디 있겠소. 가난하다 서러워 말고, 장애를 가졌다 기죽지 말고 못 배웠다 주눅 들지 마소 세상살이 다 거기서 거기외다. 가진 것 많다 유세 떨지 말고, 건강하다 큰소리 치지말고 명예 얻었다 목에 힘주지 마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더이다 잠시 잠깐 다니러 온 이 세상, 있고 없음을 편 가르지 말고, 잘나고 못남을 평가 하지 말고, 얼기 설기 어우러져 살다나 가세. 다 바람같은 거라오 뭘 그렇게 고민하오. 만남의 기쁨이건 이별의 슬픔이건 다 한 순간이오.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산들 바람이고 외로움이 아무리 지독해도 눈보라일 뿐이오. 폭풍이 아무리 세도 지난 뒤엔 고요하듯 아무리 지극한 사연도..
사라는 내 인생에 깊이를 가져다 주었다. 서른 다섯 살에 처음으로 동지라고 부를 수 있는 이성을 만나게 된 나는 사라가 주는 나날의 흥분과 평온, 타인과 공명할 떄 생기는 '삶'의 맛에 애번 신선한 감동을 느꼈다. 한편으로 내 일에 대한 위화감은 해소되지 않은 채 계속 남아 있었고, 날이 갈수록 가슴속에 깔린 안개의 농도는 오히려 더 짙어졌다. ............................................ "지나쳐가는 나날들, 지나쳐가는 사람들." 어느 날 밤, 사라와 함께 침대에 누워 그렇게 중얼거렸다. "내 요리도 사람들 앞을 그저 지나쳐갈 뿐이야. 그 사람들이 내가 만든 요리를 진짜로 먹었다는 실감조차 느낄 수가 없어." "나도 그래요." 뜻밖에 사라가 동조하는 말을 했다. "다양..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임응식 사진전을 보러 가는 길, 주차장을 찾아 덕수궁 돌담길에 들어섰다가 양편에 늘어선 플랭카드때문에 보게 된 전시. "하늘에서 본 지구" - 이미 그의 유명한 몇장의 사진이 커버로 나온 책들(옐로우스톤의 총쳔역색 온천구를 찍은 사진과 사막을 가로지르는 낙타 상인들과 긴 그림자 사진) 을 몇 번 본 적이 있어 설레는 마음으로 그 자리에서 바로 시립미술관으로 보러 갔다. 결론만 말하자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던 전시다. 예전 시립미술관에서 마그리뜨 전시할때 만큼은 아니지만 , 하늘에서만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사진들, 기괴한 풍경들, 그리고 추상화같기도 한 대지의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바글바글한 사람들틈에 밀려서 훌렁 훌렁 봐야 해서 아쉬웠지만 특별히 선물받은 도록에..
" 불안한 사랑 속에서 청춘을 보내고 나자 나는 더 이상 변해버리거나 빛이 바래고 마는 불완전한 감정에 마음을 내어주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집을 지었다가 허물기를 반복하는 사랑과 이별 대신 허물 일 없는 아늑하고 평화로운 집 한 채를 마음속에 지어주자고 다짐했다. 사랑하고 싶은 것들을 정해놓고 상처를 주지 않는 것들에게만 마음을 주었고 그 시간들은 나의 상처를 보듬어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청춘의 어둠과는 다른 더 깊고 까마득한 어둠이 있는 곳에 갇혔다. 사랑도, 사람도 없는 긴 터널 속에. 나는 그 어두운 곳을 더듬어 오면서 이따금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사람과 사랑을 떠올렸다. 그리고 터널의 끝을 빠져 나왔다고 생각할 즈음,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의 어깨에 기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