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c Nomad
Kohl's plastic bag 본문
이제는 돌아가셨지만...
할머니가 아직 살아계셨을 때 미국에 갈때면 늘 엘에이에 들러 할머니를 뵈러 갔었다.
피츠버그에 있을때도 언니랑 같이, 샌프란 언니네 갔을때도 일주일정도 빼서 늘 엘에이로 내려왔고,
결혼 후 남편과 함께 할머니께 인사드리러도 갔고, 아이가 태어나고는 또 그 아이 인사시키러 부모님을 모시고 매년 갔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증손녀 커가는 모습을 조금 보여드릴 수 있었으니, 지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삼촌과 숙모님은 일하러 갔다 저녁에 오시고, 거의 방에만 계셨던 할머니랑 옛날 얘기하며 심부름 조금 하고도- 감 따라, 호박 따라, 양말 신어, 밥 먹어라 등 할머니 지시사항- 식구들이 다 돌아오는 저녁까지는 하루가 매우 길었다.
혼자 다니러 왔을 때는 운전 할 차도 없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매우 길어 그 뜨거운 엘에이 공기 속에 늘어져만 있을 순 없어 지도를 보고 근처 쇼핑몰을 서치하기 시작했다. 차로 가면 금방이지만 몇 블럭이 온통 집뿐인 엘에이에서 - 걸어다니는 사람 보기 힘든 뜨거운 도로를 걸어 쇼핑몰가기가 무척이나 고민이됬다.
한 25분정도 뜨거운 시멘트 도로를 걸어- 차 타고 다니는 사람들의 의심쩍은 눈초리를 못 본 척하며 근처 쇼핑몰에 도착했고, 넓디 넓은 쇼핑몰을 다리 아플 새도 없이 구경하기 바빴다. 각종 향신료 즐비한 슈퍼마켓, 싸고 맛있는 초콜릿이 가득한 디저트 가게, 옛날 티지아이에프스러운 패밀리 레스토랑에,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져있는 백화점인데 백화점 같지 않은 쇼핑몰.
그 중에서 Kohl's 는 없는게 없는 종합쇼핑백화점이었다.
세일에 세일을 더해 너무 싼 가격이 의심스러울 정도의 의류들과, 값비싼 향수인데 너무 무심하게 유리 선반에 툭 올려놓은 미국식 센스(?)까지도 재미있었다. 키친 코너에서 들고 갈 수도 없는 커다란 주물 통을 보고 가격표만 만지작 거리고,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었다 벗었다하기도 지겹지 않았다. 보기 드문 민트색 계량스푼 세트 하나를 5.99에 득템하고, 양쪽 어깨가 파진 쥬시 꾸뜨르 셔츠를 10.99에, 찡이 잔뜩 박힌 락앤 리퍼블릭 청바지를 34.99 에 사고 담아준 회색 비닐 봉투에 넣고 휘휘 인기가요를 따라부르며 열기가 식은 길을 되돌아 왔다.
매끌 매끌하며 검지도 하얗지도 않은 매력적인 비닐봉투였다.
십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쓰러기 담아 버리기에도, 누군가에게 뭘 줄때 휙 담아 건네기도 왠지 아까워 잘 접어 보관중이다.
이 봉투에 담겨 온 물건들은 이제 여기저기 흩어져 천덕꾸러기 신세이지만, 도저히 쓰레기 봉지로 쉽게 써버릴 수 없는 심리는 무었일까...
그래도 봉투를 왜 모으냐고 다그치지 않는 사람과 살고 있어 참 다행이다...
요즘 새로 바뀐 비닐 봉투는 어떤 컬러, 어떤 문구가 적혀있을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