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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ow Bicycle #1>추억따라 흘러가는 불광천 코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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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ow Bicycle #1>추억따라 흘러가는 불광천 코스

isygogo 2012. 1. 19. 18:33

 세발 자전거를 처음 배운 곳에서 시작하는 두발 자전거

 


서울의 많고 많은 자전거길 중에서 굳이 불광천을 고른 이유는 단지 유년시절에 대한 그리움때문이다. 불광천을 지척에 두고 이 근처에서 10여년을 살았던 어린 시절, 개천(그때는 그저 개천이었다)’은 모험심과 탐구심이 최고조에 달할 즈음 그 시절 나의 활동 중심지였다.

옛날 하천 위에 도로를 놓은 복개구간 끝의 다리 아래로는 시커먼 하수도 입구가 그대로 입을 쩍 벌린 채 있었고, 커다란 입과는 대조적으로 거의 물이 흐르지 않아 하천 바닥에는 온갖 쓰레기가 쌓여갔고, 물 속 2센티미터도 보이지 않을 만큼 탁하기만 했다.

하지만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동네 언니 오빠들을 따라 이 하천에 모여 편을 나누어 얼음 땡을 하고, 오징어집을 하기도 하고, 봄이면 강둑 위에 심어놓은 개나리가 아래로 축 쳐지며 생긴 공간에 들어가 앉아 소꿉놀이를 했다. 그때는 개나리와 하천 근처의 잡초 말고는 제대로 관리되고 있는 풀조차 없었고, 그저 흙먼지 가득한 개천가였기 때문에 그 흙 바닥에 네모난 금을 그어 밭이라 하고, 논이라 하며 해가 기울어 진짜 집에 돌아가야 할 때까지 앞머리가 땀에 젖을 때까지 놀았다..

학교에 들어가서도 집에 와 가방만 던져 놓고 골목으로 나가면 따로 약속을 하지 않아도 한 명 두 명 친구들이 대문을 열고 나와 저절로 무리를 지어 장소도 정하지 않은 채로 하천가로 가곤 했다. 그때만 해도 언제까지나 이런 생활이 계속 될 거라고 믿었다. 아니, 한 살 두 살 먹어가면서 바뀌리란 건 생각조차 못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꿀 같은 시간은 작은 사건 하나로 거짓말처럼 뚝 끊어지고 말았다. 박쥐 때문이었다.

여느 날처럼 친구들과 함께 개천가로 내려가 흙 바닥에 네모난 금을 그어놓고 서로 편을 먹고 땅 따먹기를 하고 있는데, 제 순서가 아닌 친구가 시커먼 하수도 입구 쪽 수풀 더미를 뒤지다가 날개가 꺽여 날지 못하고 있는 박쥐 한 마리를 발견했다. 처음 보는 박쥐는 생각만큼 무섭지도 사납지도 않았다. 아직 어린 새끼의 축축한 작은 코가 실룩거리며 낯선 이를 경계하며 바들 바들 떨고 있었다. 놀이는 이미 뒷전이 된 지 오래고, 어디가 다쳤는지도 모르면서 치료해주자고 다들 한 마디씩 의견을 내느라 금새 소란스러워졌다.

서로 돌아가며 박쥐를 손에 얹어 안아주고 있는 와중에 한 친구가 접힌 날개를 살짝 만지자 어린 박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이빨을 드러냈다. 갑작스런 박쥐의 반응도 놀랐지만, 입구 가까이 서 있는 바람에 에코 음향까지 덧붙여진 박쥐의 무시무시한 울음 소리에 다들 혼비백산 박쥐를 던지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새끼 박쥐의 소리를 듣고 하수도 저 깊은 곳에서 박쥐 떼가 후두둑 날아오를 것 같아 모두들 필사적으로 개천 언덕을 네 발로 기어 올라갔다. 그 중 도망가던 한 친구가 연립주택 문 사이에 만들어 놓은 가로대에 부딪쳐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다.

바로 탁구공만한 혹이 이마에서 불어나기 시작했고, 박쥐보다 더 놀라 울고 있는 친구를 집으로 데려와 터지지 않을까 조심하며 요오드팅크를 발라줬다. 엄마한테 혼날 일이 더 걱정인 친구는 빨개진 혹을 이마에 달고 한참을 내 방에서 울다가 돌아갔는데, 그 후 자연스럽게 개천가엔 가지 않게 됐다. 버려두고 온 박쥐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도 있었고 그 박쥐 가족들의 복수를 당하지 않을까 무섭기도 했다. 그 후, 활동 반경이 좁아진 우리는 동네 골목이나 새로 발견한 연립주택 공터를 돌며 놀곤 했지만 어느 누구도 개천에 다시 내려가 놀자는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퀴퀴한 지하 곰팡이냄새와 비 온 다음 날이면 더 심해졌던 역한 하수구 냄새에도 불구하고 양 쪽 강둑을 넘나들며 뛰어 놀았던 곳이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해 찾아간 불광천은 그 당시의 모습도 익숙한 냄새도 남아있지 않은 전혀 새로운 곳으로 변해있었다. 단 하나, 복개구간이 끝나는 다리 아래 하천이 모습을 드러내는 곳만 그대로였다. 다리 아래로 크게 벌리고 있던, 저 깊은 동굴 속 어딘가 세상을 등지고 사는 기인이 살고 있다고 해도 믿었을 그 곳을 다리 위에서 물줄기가 떨어지는 폭포 시설로 가려져 있었다. 흐름이라고는 전혀 없던 이 곳이 시원하고 맑은 물이 하천 사이에 놓아 둔 징검다리 사이로 콸콸 흐르고 있었다. 넓게만 느껴지던 개천의 양 가장자리에는 온갖 수초와 풀들이 자라나 있었고 보행자도로와 자전거 도로가 초록색과 빨간색 도로로 나뉘어져 있었다. 중간 중간 징검다리 위에는 아이들이 잘 덥혀진 돌다리 위에 앉아 물 속에 두 다리를 담근 채 제들끼리 종알대느라 바쁘다. 저 만한 나이의 꼬마아이였을 때, 저녁 먹고 나면 산보가시는 아빠 뒤를 따라 개천가를 돌곤 했었다. 너무 멀리 간다고 투덜거리던 우리들에게 아빠 어렸을 적에는 아침 저녁 학교 가는 길이 십리도 넘었다면서 저 앞에까지만 가자고 하시며 슬슬 달래곤 하셨다. 지금은 그때처럼 아빠 팔에 매달려 가기엔 너무 쑥스러운 나이가 된 게 조금 아쉽다.

 

옹기종기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힘을 가진 하천

 

 

역촌동, 응암동, 증산동을 지나 성산동까지 이어져 있는 불광천은 홍제천을 만나 한강으로 빠지는데 이 좁은 자전거 도로 길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금새 월드컵경기장까지 닿을 수 있다.

작지만 아담한 이 하천 변을 따라 동네 사람들이 저녁 먹기 전 마실을 나와 산책을 하고, 운동기구를 하나씩 붙잡고 허리를 돌리고, 맨손체조를 하고, 자전거를 타고, 강아지와 달리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 눈부셨다. 20년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당연히 이 하천도 메워지고 이 위에 새로운 아파트가 지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40년 전 아빠가 기억하는 그 당시의 하천변의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동네의 정취란 이런 게 아닐까. 사라져가는 골목의 문화는 특별한 게 없다.

약속시간을 정하지 않아도 장소를 정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사람이 모이고, 얘기가 오고 가고, 웃음이 베어난다. 특별한 장난감이 없어도 골목 안의 맨홀과 전봇대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놀이를 하던 내가 이제는 친구들을 만나도 전화기만으로 모든 놀이를 하고 있다.

다시 한 번 편 먹고 짬뽕공 경기를 하고 싶다고 해도 이제는 서로 머쓱한 나이가 된 걸까. 중간 다리 즈음 와서 잠깐 페달을 멈추고 강둑위로 쭉 늘어 선 빌딩을 세어보다가 이 즈음 있었던 작은 두부 집을 기억해냈다. 그때는 주택이 쭉 늘어서 있던 곳이 이제는 다세대 빌라와 맨션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가끔씩 저녁때면 동생과 자전거를 타고 두부를 만들던 할머니 댁으로 와 비닐 봉지 한 가득 순두부를 담아 가곤 했었다. 마당 안에 큰 가마솥을 놓고 불을 떼 콩을 삶고, 납작하고 둥근 차돌을 올려놓아 두부 물기를 빼고, 뜨거운 김이 모락 모락 나는 두부 한 모 한 모를 차가운 물에 담가 식히던 할머니의 분주한 손놀림이 그리워졌다. 기억 속에 있는 두부 집 거리만큼을 와 뜨거웠던 두부 대신 차가운 커피 한잔을 마시며 상암동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따가운 늦은 오후의 햇살마저 기분좋은 일요일 오후다. 그때 같이 했던 친구들과 함께였으면 더 좋았을 테지만 여기까지만 감상에 젖어있도록 하자.

응암역을 시작으로 다섯 곳의 지하철 역을 지나 월드컵 경기장까지 닿았다. 조금 더 욕심을 내 한강까지 가 볼까 했는데 지친 종아리에 발목을 잡혔다. 전철을 타고 돌아갈까 잠깐 고민을 하다가 오늘 한 번 끝까지 추억의 페달을 돌리자 싶어 반대편 하천변으로 자전거를 끌었다.

돌아가는 길, 무지개 다리의 오색 불이 켜지만 다리 아래 잠시 서서 동네 친구들에게 전화라도 한 통 해봐야겠다. 카톡이 아니고, 음성통화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