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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ow Walk #2 부암동 백석동천 - 백사실 계곡 >

isygogo 2012. 5. 29. 16:08

골목 골목 세월의 때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서울 안의 옛 동네, 부암동

 

 

 

어느 드라마의 배경으로 나오게 되면서 순식간에 유명해진 동네가 있다. 한적하고 약간은 시대에 뒤떨어진 듯한 느낌마저 드는 개발이 덜 된 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드는 동네, 하지만 근처 사는 주민으로서 이 북적거림이 사실은 조금 반갑지 않지만 나 역시 그 인파에 묻혀 골목길을 헤매는 곳, 바로 종로구 부암동이다. 작고 아담한 소품가게, 소박한 맛이 있는 레스토랑과 카페, 푸짐한 떡시루에 얹혀진 떡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집, 유럽풍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작은 인테리어 가게, 따로 선전도 안 하고, 작품수도 많지 않은 두 평짜리 갤러리 등 개발이 더디기만 하던 이 동네에 요즘 부쩍 70-80년대 옛 추억을 다시 되짚으며 서울의 옛모습을 찾고자 하는 외지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미친 듯이 발전을 위해 달려갈 때는 언제고 또 이제는 옛 생각에 추억거리 찾아 또 달려드는지,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가 보다. 가장 돌아가고 싶어하고 그리워하는 10대 때의 순수함에 대한 아련함 때문인지, 정신 없이 미래를 향해 앞질러 가려 노력하는 30대를 지나서는 모두들 어깨에 힘을 빼고 계산 없이, 이해관계 없이 사람과 부대끼며 살던 그 때를 다시 회상하게 되는 것 같다.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그 많은 거대한 산들 중에서도, 청와대 뒤로 병풍 치듯 자리 잡은 북악산 속에 60-70년대 서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 바로 이 곳 백사실 계곡이다. 보통은 부암동쪽에서 오르거나, 세검정 쪽에서 오르지만 오늘은 서울예고 안쪽에 자리한 산길로 오르기로 했다. 다른 두 곳의 길에 비해 약간의 등산하는 기분으로 올라야 하지만, 산세가 험하지 않고 등산을 좋아하지 나도 가끔 한 번, 이 정도면 가 볼만 하지 라는 기분으로 갈 수 있는 곳이다.

학교 안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려오는 냇물 위 돌다리를 건너면 오른쪽으로 이 땅을 학교에 헌사한 사람의 기념비가 보인다. 그 기념비를 지나쳐 작은 샛길로 발을 디디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타임머신에 올라탄 셈이다.

왼쪽으로 나 있는 잡목림 무성한 계곡에는 비가 오지 않아 그런지 작은 웅덩이 몇 개 빼고는 물이 흐르지 않는다. 몇 일 내 비가 오지 않으면 다 말라버리는 게 아닐까 괜히 걱정도 된다. 사람의 손길이 잘 닿지 않아 무성하게 가지를 드리운 나뭇가지들이 길의 절반을 뒤덮고 있어 앞으로 나아가며 가끔 잔가지들을 손으로 훝으며 지나야 했다. 내가 내쉬는 숨소리와 귓가에서 윙윙거리는 산모기 소리, 그리고 가끔 우짖는 새소리 말고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가다보니 자연스럽게 걷는 모양새를 생각하게 되고, 호흡에 집중하게 됐다.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 둘, 후욱- 하나 둘, 후욱- 그렇게 호흡을 유지하며 돌부리에 채이지 않게 가끔 발끝을 쳐다보며 걸었다.

 

 

 

 

70년대 서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현대 유적지

 

쓰러져 썩어버린 나무 그루터기가 그대로 작은 디딤돌처럼 계단을 이루고, 양 옆으로 들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그 향기에 머리가 지끈하다. 잔뜩 약이 오른 것처럼 빨갛게 익은 산딸기도 한움큼 따서 입에 털어넣었다. 단맛은 고사하고 그 시고 떫은 맛에 목만 아프게 기침을 해댔다. 한참을 오르니 이제는 돌담과 축대만 남아있는 집터가 여럿 눈에 띈다. 김신조가 내려오기 전까지 이곳에 살던 사람들의 집이다. 김신조사건(1968년 1월 21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정찰국 소속의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세검정고개까지 침투한 사건으로 유일하게 생포되었던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김신조사건이라 칭한다) 이후 이 곳은 민간인 출입금지 구역이 되었고 이 계곡 옆에 살던 사람들 또한 이사를 가야했다고 한다.

한참을 오르다 보면 작은 갈래길이 나온다. 오른쪽 길로 들어서 약 10분 정도 올라가면 산등성이에 다다르게 되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 내려가면 된다. 중간중간 샛길이 많아 헤매기 쉽지만 어느 길을 택하든 백사실 계곡으로 향하니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중간 약수터에서 졸졸 감질나게 흐르는 약수를 바가지 한 가득 담아서 꿀떡 꿀떡 쉬지 않고 마셨다. 때이른 폭염에 숨이 턱까지 차고 얼굴은 이미 홍옥처럼 물들었고, 이마엔 땀이 번들번들했다. , 그대로는 못 가겠다 싶어 옆에 있는 벤치에 털석 주저앉았다. 날을 잘못 골랐나, 그냥 집에서 시원한 아이스 티 한잔 마시며 늘어지게 텔레비전이나 볼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잠깐 들었지만, 산등성을 넘어버린 지금, 다시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 아 내가 잠깐 미쳤었나봐- 하는 생각을 하며 벤치에 누워 헉헉 숨을 고르고 있자니 울창한 나뭇길 사이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가는 수밖에 없구나생각을 하며 다시 일어나 좁은 산길 내리막을 한달음에 달려 내려갔다.

 

백사 이항복의 싯귀가 물 따라 구비구비 흐르는 풍류 계곡

 

 

 

 좁은 산길이 끝이 나나 싶을 때 갑자기 시야가 넓어지며 넓은 집터와 연못터, 작은 계곡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곳이 바로 1800년대 조성되었던 별서(농장이나 들이 있는 부근에 한적하게 따로 지은 집. 별장과 비슷하나 농사를 짓는다는 점이 다르다) 유적지, 백석동천이다.
 이항복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우리에겐 오성과 한음 일화로 더 유명하다. 울창한 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싸여 산세에 폭 쌓여있는 형세를 하고 있는 이 곳에 이항복이 기거하던 건물터연못터 등이 남아 있는데, 비가 내리지 않아 그런지 연못 한가운데 약간의 물 웅덩이만 고여있고 바짝 말라있다. 예전에는 계곡 위쪽까지 물길 밟으며 위쪽으로 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도롱뇽 산란기라 그런지 보호막 줄이 쳐져 있어 올라 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쓰러지기 직전의 댓돌에 양반다리를 하고 주저 앉았다. 앞쪽에는 연못터, 뒤로는 별서 터, 그리고 하늘위로는 푸른 천장이 나를 감싼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도 많이 않아 이대로 정좌하고 수련에 들어가도 될 정도로 조용했다. 생각난 김에 허리를 쭉 펴고 앉아 눈을 감고 잠시 명상을 해봤지만, 익숙하지 않은 터라 10분을 못 참고 눈을 뜨고 말았다. ‘풍류를 즐기고 자기 수양을 하는 것도 쉽지가 않구만.’ 혼자 끌탕을 하며 주변을 돌아보며 날씨 좋은 날, 이 정자에 앉아 수면 위를 날아다니는 소금쟁이와 연못의 융단이 되어 준 맑은 구름을 보며 <백사집>을 지었을 이항복을 생각하니 그 여유와 그 여유를 즐길 줄 아는 그의 마음가짐에 샘이 난다.

 

 

 

 처음 이 곳을 올랐을 때는 셋이었다. 엄마와 이제 막 새 식구가 된 올케와 함께 좁을 길을 올라올 때 내 입은 한치나 나와있었다. 이른 아침, 따뜻한 이부자리에서 끌려 나와 두 사람 뒤를 따르며 산을 올라야 했으니, 덜 깬 머리와 부은 눈에 이 파라다이스가 제대로 보일 리 없었다. 그때도 중간에 들러 약수를 마시고, 아무 길을 하나 잡아 내려와 이 계곡까지 왔었다. 그리고 엄마가 올케에게 이 터의 역사와 그 옛 주인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셨고, 올케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연방 , 그렇군요, 우와, 신기하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왜 어렵지 않겠는가, 시어머니인데.  참으로 멀고도 가까운 사람이겠지혼잣말을 하며 댓돌에 앉아있는데 올케가 옆으로 앉으며 집에서부터 가지고 온 사과 한쪽을 꺼내 건낸다. ‘언니, 아니 형님, 다음 주에 여기 또 와요. 새벽에 일찍 오니까 그래도 너무 좋은데요. 운동도 되고 매일 유치원 애들하고 씨름하다가 조용한데 있으니까 살 거 같아요. 동네에 이런 곳이 있으니까 꼭 아지트 같은데요.’ 아직은 어색한 호칭으로 잘도 부른다 싶었다. 엄마가 옆에서 가져온 주머니 칼로 사과를 깍아 본인은 드시질 않고 우리에게만 자꾸 자꾸 건네주셨다. 별 다른 말은 없었지만 셋이 나란히 앉아 숲 속에서 사과 한 쪽씩 베어 물고 있는 게 뭔가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서로 할 말은 많았고 아직 서로 어색한 부분이 많았지만 각자 사과만 오물거리며 엄마는 근처 풀들을, 나는 하늘을, 올케는 앞 쪽 개울만 바라보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씩 산에 오르는 일은 안하고 싶다고 맞장구를 치며 딴 짓을 했지만 속으로는 새로운 일상이 하나 추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라고 생각을 했다. ‘뭘 맨날와, 그냥 계절 바뀔 때 가끔 오는 게 좋지하며 엄마가 침묵을 깨고 일어나셨지만, 엄마도 누군가와 함께 하는 아침 산책이 좋으셨는지 그날따라 유난히 눈가의 주름이 돋보였다.

 물론 그 후에 이런 저런 이유로 매주 오기는 힘들었지만, 가끔 이렇게 일이 밀리고, 하기는 싫고, 무언가에 떠밀려 시간만 자꾸 가는 것 같을 때 종종 찾는 비밀의 계곡이 됐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건 내 작은 이기심일까. 앉아 있으니 살짝 피곤하다. 이제 충전했으니 집에 가서 평범한 일상에 다시금 스스로를 던져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