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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레이드 - 요시다 슈이치 본문

kohmen:::Book (책 소개)

퍼레이드 - 요시다 슈이치

isygogo 2009. 1. 26. 16:22
퍼레이드 Parade - 요시다 슈이치 (은행나무- 9500won)

처음 그의 책을 집어 든 것은, 사실- 그에 대한 메마른 칭찬이나 그의 뛰어난 문학성에 대해 미사여구를 늘어놓은 신문의 신간코너때문도 아니고- 단지, 매대위의 많은 책들 중에서 제일 눈을 끌었던 맑은 하늘색 책 표지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의 첫 책을 읽고 난후, 그는 하루키와 몇몇 일본 작가들을 제치고 요즘 내가 가장 열중하는 페이보릿 작가가 됬다.
연휴 하루전- 교보에 갔다가 사게 된 퍼레이드. 2002년 야마모토 슈고로 상을 받은 책으로, 그의 인간 심리 묘사가 특히 세심하게 그려져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학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인 경제학부 3학년 요스케, 인기배우와 사귀는 숨겨둔 애인-으로 하루종일 집에서 그의 전화만 기달는 고토, 뭐때문인지 늘 괴롭고 삶이 힘들어 술에 절어 사는 미라이, 어쩌다 술 취한 미라이에게 발견되 이 집에 가끔 들락날락 하는 사토루, 그리고 원래 이 집을 임대했던 이 집의 제일 연장자 나오키. 방 두개, 거실 하나, 욕실 하나, 부엌 하나인 집에서 5명이 서로 '서로가 잘 아는 친구인척' 살아가는 정말 말그대로 묘한 이야기다.

나 역시 약 10년 전, 외국에서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과 어느 순간부터 '식구'가 되어 약 일년간 한 집에서 그들과 살았던 기억이 있는데, 그 때의 내 위치는 서열 제일 밑의 '막내'라는 위치여서- 이 사람들처럼 편하게 친구처럼, 식구처럼 내 생활을 하며, 집이라는 공간만 공유해서 사는 삶이 아니었지만, 처음에는 낮선 환경에 적응해나가는 어색함과 불편함마저 모험처럼 느껴졌더랬다. 하지만, 딱히 좋은 결과를 내고 그만둔 동거생활은 아니었지만,  지금 가끔-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동거하는 생활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낮선 환경에 던져진 불편함과 왠지 모를 짜릿함이 그리운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때랑 다르게 좋은 추억만 만들어가지 않을까 싶지만, 역시- 누군가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는 인내와 자기 조절이 필요한 일임은 틀림없다. 이제는 늦은 밤 김치전을 부쳐 먹는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 살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 화창한 일요일 오후, 내가 왜 이렇게 베란다에 나와 서서 코 앞의 도로를 바라보고 있는가 하면 이유는 단 한 가지, 심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심심할 때면 왠지 시간이란 직선의 개념이 아니라 그 양끝이 연결된 원 같은 느낌이 들고, 아까 지나간 시간을 다시 한 번 새롭게 보내고 있는 듯한 생각도 든다. 현실감이 없다는 표현은 어쩌면 이런 상태를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베란다에서 뛰어내린다고 상상해보자. 물론 여기는 4층이니까 재수가 아무리 좋더라도 골절일 것이고, 재수가 없으면 즉사한다. 그러나 원 같은 시간 구조속에 있다면, 첫 번째에 즉사였다고 하더라도 두 번째 기회가 있다. 첫 번째 즉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에는 가벼운 골절만으로 끝나는 시도를 해볼 수 도 있을 것이다. 세 번째는 뛰어내리는 일에도 질려 버려 철책에 걸터앉는 것조차 싫어질지 모른다. 뛰어내리지 않으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변화가 없으면 원래의 그 지루한 시간이 다시 찾아온다." 
                                                             
-----  스키모토 요스케, 21세. H대학 경제학부 3학년. 현재 시모기타자와의 멕시코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 중. 
                                                                                     

"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던 나는 그들 뒤를 따라가야 할지, 그대로 발길을 돌려야 할지 망설였다. 그들을 따라가야 한다고 손을 잡아끄는 나의 분신이 있었다. 그리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윽박지르는 또 하나의 분신도 있었다. 그리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윽박지르는 또 하나의 분신도 있었다. 두 분신에게 각각 손을 하나씩 맡긴 채 극심한 혼란에 빠진 나는, '그날 그 모래사장에서 뭔가 도울 수 있는게 있다면 말해달라고 했던 나는 도대체 어느 쪽인가' 스스로의 내면을 향해 물었다. 그러나 그때 미안한 듯, 정말이지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듯 손을 치켜든 쪽은 "집으로 돌아가!" 라고 윽박지르는 분신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전화가 왔다. "어제는 미안했어"라고 사과하는 마루야마에게 나는 "괜찮아, 사과할 것 없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밀리언셀러가 될 것 같던 드라마 주제가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그 후로는 그와 볼링을 치러 가도, 바닐라 쉐이크를 마셔도, 아니 그저 "마루야마 전화야"라는 여동생 목소리만 들어도 그의 어머니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 그와 교제하는 게 그의 어머니와 교제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고 말았다. "

_____  오토우치 고토미, 23세. 무직. 현재, 인기배우 '마루야마 도모히코'와 열애 중.


"요즘 세상엔 2주일 정도만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면 세계일주를 하는 것도 꿈이 아니다. 부산떠는 게 체질에 맞지 않아 배낭 여행을 하는 사람이라면 버스로 베트남 농촌을 돌아보며 열심히 일하는 농민들의 모습에서 '자아 찾기' 취미를 즐길 수도 있다. 물론 어떤 형태의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꽁무니를 빼듯 일본으로 도망쳐 돌아온다 한들 그 역시 내 알바 아니다.                    

여기서 살고 있는 나는 틀림없이 내가 만든 '이 집 전용의 나'이다. '이 집 전용의 나'는 심각한 것은 접수하지 않는다. 따라서 실제의 나는 이 집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곳에 함께 사는 요스케, 고토, 나오키, 사토루가 나처럼 '이 집 전용의 자신'을 만들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들도 실제로는 이 집에 존재하지 않고, 결국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굳이 '이 집 전용의 나' 따위를 만들어낼 필요도 없고, 나는 나로서 당당하게 거리낌없이 지낼 수 있다. ..... 아니, 그렇지 않다. 당당하고 거리낌없이 살 수 있는 이유는 여기가 무인의 집이기 떄문이다. 그런데 이곳이 무인의 집이 되기 위해서는 여기에 '이 집 전용의 우리'가 존재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이 집 전용의 우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역시 우리밖에 없으므로 결국 이 집은 잠버릇 나쁜 요스케, 텔레비전만 보는 고토, 아침부터 포로틴을 마시는 나오키, 어린 주제에 톳나물을 좋아하는 사토루 그리고 내가 반드시 좋아하는 답답할 정도로 꽉 찬 만실상태가 된다. 실제로는 꽉 찬 만실이면서도 텅 빈 공실. 그러나 비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꽉 찬 상태. .......잘 모르겠다. "

------  소우마 미라이. 24세. 일러스트레이터 겸 잡화점 점장. 현재, 삶을 고뇌하며 음주에 심취 중.
 

"손목 시계를 보니 네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센 강을 따라 내려가 세이조를 지나 가라스야마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요즘 들어 왠지 자주 걷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항상 서 있는 공원에서, 손님과 같이 머문 호텔에서, 손님의 집에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나온 사우나에서, 필로폰을 너무 많이 해 이불에 오줌을 쌀 뻔했던 마고토의 아파트에서 ---- 여러 장소에서부터 걷기 시작하지만, 언제나 걷기만 할 뿐 내게 도착지란 없다.

그가 침입한 오두막에는 아직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은 통조림이며 훈제 햄 등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곳에서 두려움에 떨며 하룻밤을 보낸 나오키는 다음날부터는 더욱 대담해졌다. 마룻바닥 아래에서 장작을 꺼내 이틀째 밤에는 난로에 불을 지폈다. 날이 새자 새하얀 숲을 산책했다. 겨울 햇살을 받아 더욱 새하얗게 빛나는 숲을.
' 그곳에 있는 동안 정말 기분이 근사했다. 근사하다는 말은 요즘은 잘 쓰지 않지만 그곳에서 보낸 며칠 동안은 정말 근사하다는 말로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어. 음. 정말로 근사했지' "

------ 고쿠보 사토루. 18세. 자칭 '밤일'에 종사. 현재, 쓸모없는 젊음을 팔아치우는 중.

"그런저런 이유로 나는 내 자신이 득을 보는 차원에서 행동을 했는데도 고토도 요스케도 미라이도 사토루도 어째서인지 무슨 문제만 생기면 당연한 듯이 내게 상담을 하러 온다. 오늘밤 고토의 일만 해도 그렇지만, 누가 상담을 요청해도 나는 진심으로 걱정을 해준 일이 없다. 그들에게는 일종의 이해심으로 ㄴ껴지는지, 본의 아니게 나의 주가만 올라갔다. 상대에게 동정심을 표시하지 않는 것으로, 어느 틈엔가 나는 그들의 좋은 큰형님역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이런 제멋대로인 배려에조차 만족하는 그들은 대체 세상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 그들이 걱정스럽기도 하다. 아니, 내가 자꾸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이 내게 기대는지도 모른다."

------  이하라 나오키. 28세. 독립영화사에 근무. 현재, 제54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의 향방을 예상 중.